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(문단 편집) === 왕세자비 === 결혼한 바로 다음 해 아버지 [[크리스티안 9세|크리스티안]]이 왕위에 오르고, 남동생 [[요르요스 1세|빌헬름]]은 [[그리스 왕국]]의 왕이 되었으며, 여동생 [[덴마크의 다우마|다우마]]는 [[러시아 제국]]의 [[알렉산드르 3세|알렉산드르 황태자]]와 약혼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. 알렉산드라 본인 또한 첫 아이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[[앨버트 빅터 크리스티안 에드워드|앨버트 빅터 왕자]]를 출산하였는데, 본래 예정일보다 2달 일찍 나온 미숙아였다.[* 다만 아이들 6명 모두를 미숙아로 출산한 것을 보면 시어머니 [[빅토리아 여왕]]이 출산하는 것을 못 보게 하려고 일부러 날짜를 속였다는 이야기도 있다.] 이후 [[조지 5세|조지 왕자]], [[루이즈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다그마|루이즈 공주]], 빅토리아 공주, [[모드 샬럿 메리 빅토리아|모드 공주]], 알렉산더 존 왕자를 낳았다. 아이들에게 냉담했던 [[빅토리아 여왕]]과는 달리 알렉산드라는 따뜻한 어머니였지만, 반복되는 출산으로 평생 [[류머티즘]]을 앓아야 했다. 알렉산드라는 장남 부부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여왕에게 타고난 다정한 성격으로 다가갔다. 이 노력은 훗날 빅토리아가 조금이나마 마음을 여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. [[파일:ALexandra_of_Denmark_Princess_of_Wales.jpg|width=500]] 알렉산드라의 결혼 생활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였지만 앨버트는 아내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고, 1871년에 [[장티푸스]][* 아버지 [[앨버트 공]]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병이다.]에 걸릴 때까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. 특히 앨버트는 정부도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결국 정부 [[앨리스 케펠]][* [[카밀라 파커 보울스]]의 증조할머니이다. ~~조상과 후손이 쌍으로 웨일스 공과 불륜을(...)~~]이 남편의 곁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였다. 반면에 알렉산드라는 아내의 역할에 끝까지 충실했다고 한다.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유전성 귀 경화증으로 인해 귀가 점점 들리지 않아 사교계에서도 고립되었고, 아이들, 반려동물과 궁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. 게다가 마지막 아이 알렉산더 존 왕자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사망하여 슬픔은 더욱 컸다. 조용히 장례식을 치르고 싶어했던 알렉산드라와 달리, [[빅토리아 여왕]]은 이 소식을 공식적으로 애도할 것으로 발표하였고, 이로 인해 언론에서는 동정심 없는 언론인들이 아기의 출생을 "비참한 낙태"로 묘사하고 장례 절차를 "역겨운 미라"라고 묘사했다. --미친놈들-- 설상가상으로 1892년 장남 [[앨버트 빅터 크리스티안 에드워드|앨버트 빅터 왕세손]]이 갑작스레 사망하였다. 자녀들에게 애정이 많았던 알렉산드라는 막내에 이어 장남까지 사망한 것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. 아들 앨버트의 방과 소유물은 1861년 [[빅토리아 여왕]]이 남편이었던 [[앨버트 공]]이 사망한 후 방을 보존해 뒀던 것처럼 그대로 유지되었다. 이때, 알렉산드라는 아이들과 나눴던 편지에서 "나는 나의 천사와 나의 행복을 그와 함께 묻었다."라고 말했다고 하니, 그녀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. --하지만 아들의 사생활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.-- 1894년에는 제부 [[알렉산드르 3세]]가 사망하여 미망인이 된 동생 [[덴마크의 다우마|다우마]]를 보기 위해 남편인 [[에드워드 7세]]와 함께 러시아에 간 알렉산드라는 [[알렉산드르 3세]]의 장례식까지 2주 동안 여동생의 곁에서 잠을 자고 기도했다. 이후, 둘은 평생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